목회서신

진지 알아차리기

황의정 목사 0 10,504 2018.05.03 07:37

쌀 팔로 갑니다! 쌀 팔아가지고 오세요?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쌀을 사러간다는 말이고, 쌀을 사 오십니까? 하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의 뜻입니다. 진짜 쌀을 가지고 가서 팔고자 할 때에는 쌀 내러 간다고 합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쌀을 사가지고 오면 귀신이 붙어서 뺏어갈 것이 두려워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이상하게 만들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밥이 있고 진지가 있고 수라가 있게 마련이지요. 

쌀이 귀할 때에 꽁보리밥을 많이 먹던 시절입니다. 보리쌀을 한 번 삶아 소쿠리에 건져서 삼베 수건으로 덮어 시원하게 바람이 통하는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가 밥을 짓곤 했습니다. 한 줌의 쌀을 솥 한 가운데 넣어서 밥을 지은 뒤에 그 쌀밥은 먼저 퍼서 병을 앓고 계신 아버님 드리고, 우리는 착착 이겨서 부드럽게 만든 보리밥을 먹곤 했습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쌀밥은 몸이 허약했던 동생이 먹든지, 아니면 막내 차지였습니다. 여간해서 내 차지가 되지 않아서 아예 체념하곤 했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음식을 남기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들을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닥닥 소리 나게 바닥을 긁어대니까 밥그릇 밑바닥에 구멍 난다고 하던 때니까요.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흘러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서울시민이 하루에 버리는 음식이 청주시민이 하루를 먹고도 남는답니다. 

다일영성생활수련회에서는 식사 시간에 진지 알아차리기라는 의식을 행합니다. 먼저 5관을 가지고 밥상에 오른 음식을 살피고 느끼며 대화합니다. 눈으로 모양과 색을 봅니다. 코로 냄새를 맡습니다. 느껴도 보고 대화를 합니다. 어디에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 너의 보람과 행복이 무엇이냐? 처음에는 배가 고프니까 형식적이었는데 오히려 수련회가 끝난 뒤에 점점 더 진지 알아차리기가 깊어지는 듯합니다. 

쌀의 여정을 듣습니다. 어느 날 논에 촘촘히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고 옹기종기 함께 자라다가 묘판에서 뽑혀 모내기를 합니다. 다정하던 친구들과 헤어져 띄엄띄엄 서서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가지가 벌어 다시 친구들과 살을 맞댈 수가 있었습니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힘입어 토실토실하게 영글었습니다. 추수하여 타작하고 정미소를 거치고 자루에 담겨지고 자동차 여행 후에 창고에서 몇 밤 자고 마켓에 폼 내고 있다가 우리 집에 왔습니다. 기다리다가 드디어 오늘 밥이 되어 상에 오른 것입니다. 수십 명의 손길을 거쳐서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요. 옆에 놓인 오이와 김치 깍두기도 길고 긴 이야기를 즐겁게 들려줍니다. 조금 떨어진 접시에 놓인 생선구이는 태평양에서 왔고, 그리고 스테이크는. . . 반찬을 맛나게 하는 양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 밥상을 꾸미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우주가 이 한 곳에 모였고, 인류가 이 일에 동원된 기적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한 끼 밥을 먹는 것이 기적이구나!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이 간단한 요청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머리가 숙여지고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후다닥 먹어치우고 일터로 나갈 일이 아닙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식탁에서든지, 저녁 식탁이든지 은혜 아니고 기적 아닌 밥상이 없었습니다. 어찌 감히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수가 있으며, 밥 한 톨을 어찌 그냥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차려입고 집을 나서며 몸에 지닌 것들과 대화를 합니다. 안경, 시계, 셀폰, 내의와 바지와 Y셔츠, 양말과 구두, 손에 든 가방과 그 안에 있는 하나하나. . . 밥상차리기 보다 더 큰 기적이 여기 있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우주였습니다. 갑자기 내가 VIP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 . 감사 아닌 모든 것은 설 땅이 없음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생각이 둘로스 성도님들로 이어집니다. 한 분 한 분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네요.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기 위해서 우주를 동원하고 계시니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 말씀이 빈 말이 아니네요. 독생자를 주고서라고 구원하여 옆자리에 앉히시고 싶으셨겠구나! 사랑한다는 그 말씀이 진심이구나! 한 분도 아니고, 열 분도 아니고 100분도 넘는 VIP를 한 자리에 모아주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깊이 엎드려 절하고픈 심정입니다. 내 밥그릇에 오롯이 모여 있는 쌀들과의 대화는 이렇게 제게 큰 행복의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진지 알아차리기는 어느덧 성자의 일상이 되어갑니다. 밥은 진지요 신자는 성도니까요.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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