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담의 후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낙원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인류는 유토피아를 꿈꾸었고, 가본 적이 없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고, 아무 불만도 없고, 아무 염려도 없고, 어떤 두려움도 없고, 사실 슬픔도 눈물도, 질병도 없던 에덴동산의 추억이 인간 DNA에 남아있는 증거지요.
어느 날 간교한 뱀의 꾐에 빠진 하와가 손을 내밀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선악과(Adam’s Apple)를 덥석 따먹어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철없이 행한 일이 평생 아픔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선악과처럼 끈질긴 것은 다시없었습니다.
선악과란 선과 악을 알게 해 주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도전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내 맘에 맞으면 선이라고 하고, 내 기분에 맞지 않으면 악이라고 밀쳐버렸습니다. 갑자기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으스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차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좋으신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돌변했습니다.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피해버렸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인류 최초의 사랑고백을 했던 바로 그 입으로 아내를 비방하고, 탓하고. . . 그 때부터 부부관계는 애증(愛憎)의 관계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보여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게 되고, 아내는 남편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동반자였는데 주종관계로 전락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원한다? 이 말은 남편을 조종한다는 뜻입니다. 다스리는 남편을 조종하려는 아내, 이 부부관계에 평화가 언제나 깃들까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는 때가 있습니다. 순진무구한 어린이가 드디어 선악과의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부모보다 선생님을 더 믿게 되면 부모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선악의 기준이 부모에서 선생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청소년이 되면 선악의 기준은 친구가 됩니다. 더 이상 선생님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 자기가 자기의 모든 기준이 됩니다. 선악을 아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내 의견이 가장 중요하고,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악입니다. 사랑을 해도 내 뜻대로 합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사랑합니다. 잘 났든지 못났든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엉터리고 엉망이라도 나를 고치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고 불한당이고 경우가 없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 . 뒤 돌아서 가는 사람 왜 불러. . . 수많은 인간관계가 이렇게 깨어졌습니다. 지금도 와장창 중창 주장 창창 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 선악을 결정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정의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못됩니다. 또 정의가 없는 힘은 폭력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국가의 법은 선악의 기준이지요. 공권력은 바로 이 선악의 기준인 법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의 기준이 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정하시고, 선을 보호하고 장려하고, 악을 심판하고 제재하실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이후의 인간은 불행해지고, 점점 더 초라해지고,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점 멀어져가는 아담의 후예들을 돌이키시려고 새롭게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율법 책을 주야로 묵상하여 마음 판에 새기고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는 삶, 곧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삶이 형통하고 평탄합니다. 나도 너도 이 기준에 동의하고, 함께 순종할 때에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있습니다. 판단 기준이 선명할수록 관계가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따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를 보증합니다.
뱀은 여전히 이 기준을 왜곡합니다.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불신하게 하고, 부분적으로만 동의하게 하고, 부분적으로 순종하게 하되 가능한대로 지체하게 만듭니다. 선악을 스스로 정하도록 부추기는 세속의 물결이 얼마나 거셉니까? 개인주의라는 허울과 민주주의라는 제도로 지배합니다. 투표로 결혼의 정의를 바꿉니다. 다수결로 가정의 모습을 왜곡합니다. 악한 법으로 선을 삼고, 이 법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금지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여전히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발버둥의 결과는 더욱 불행해지고 추해지고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임을 왜 알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부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 아내를 종으로 여겨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자기 몸처럼 돌보아라. 아내는 남편을 조종하려고 하지 말고, 순종하라.” 아내가 나를 위하지 있지 않고, 내가 아내를 위하는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섬기고, 뜻을 세워줘야 합니다. 배우자를 행복하게 하려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왜 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우리의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는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십니다!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