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아는 지식이 성공에 있어서 전문 지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갈수록 알 수 없다는 부부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부모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살아갈수록 실감납니다. 또 이해를 한다고 해도 내가 아는 그 사람과 더불어 살도록 수용한다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할 때의 당혹감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류 역사상 땅에 살았던 두 사람을 알면 인간을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담이요,둘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 아담(사람)이 에덴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첫 사람은 산영이 되었으나 죄를 범하여 죽음과 질병과 모든 문제를 야기했지만 둘 째 아담은 살리는 영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
그 동안에 우리가 알던 예수님은 주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처럼 죄인이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10여년전“그리스도의 수난”과 최근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이 부각되었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흐릅니다. 너무 피를 많이 쏟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자 6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처참한 모습을 대하면서 우리의 죄가 이렇게 깊었던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를 이처럼 잔인하게 죽였는가?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를 만든 멜 깁슨이 스스로 고백한 말이 이것이다: “바로 내가 예수를 죽였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완벽하게 마련된 것입니다. 이것만도 우리에게는 감지덕지한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은혜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은 예수 탄생 6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입니다(이사야 53:5).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은혜가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육체의 고통이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필요했다면 십자가 이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포학한 사형 틀이면서 동시에 가장 치욕적인 사형 방법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당했던 치욕에 대하여 아주 많이 이야기합니다.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배반, 거절, 소외, 멸시, 천대, 조롱, 강탈, 폭력, 오해, 열등감, 죄책감, 두려움, 공포,그리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이 된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먼저 마음이 상하신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머리로 아시는 분이 아니고 몸소 체험하시어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이십니다.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셨습니다(히브리서4:15).
성공자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에게 좌절을 줍니다. 부자의 돈 번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에게 절망을 줍니다. 배운 자의 이야기는 못 배운 자의 마음에 열등감을 일으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삶의 처절한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처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스스로 상처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는 죄와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모두 고침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자기 영혼의 수고의 열매임을 아십니다. 그리고 만족하게 여기십니다(이사야53:11). 예수님의 수고의 대가를 당신의 삶에서 그대로 온전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온전한 구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