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안전한 먹을거리(먹거리)

황의정 목사 0 10,681 2018.05.04 10:02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어쩌면 이렇게 진솔하게 그리고 익살스럽게 말을 잘하였을까요? 가난한 부모가 자식들 공부 잘하라고 닦달하는 것도 먹을거리 걱정 없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목적도 결국 백성들이 평안하고 배부르게 먹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참 사람 사는 것이 매우 단순하게 여겨지네요.


           어렸을 때, 보릿고개가 있을 때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만을 바랬습니다. 산골에 살던 저희는 겨울에 쌀 구경이 어려웠습니다. 논이 많지 않았고, 산등성이 개간해서 밭을 만들고, 거기에 옥수수 고무마 감자 그런 것을 많이 재배했습니다. 겨울에 집집마다 제일 큰 방 윗목에는 둥글게 만들어진 고무마 창고가 있었습니다. 천정에 닿을 만큼 쌓아놓은 고무마를 겨우내 먹다보면 봄철에 가서 보리농사 수확하기 전에 바닥이 납니다. 그 모질고 배고픈 시절, 보리 수확할 때까지의 극한의 가난한 시절을 보릿고개라고 불렀습니다.


           어언 세월이 빠르게 흘러 버리는 음식이 태산같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하루에 버리는 음식이면 청주시민이 한 달을 먹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니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배부르게 먹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더 먹어!” “많이 먹어!” 이 말처럼 정겹던 말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이제는 모욕이고 부담입니다. 맛있고, 살찌지 않고, 성인병 안 걸리는 음식을 찾아서 한 두 시간 차타고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때가 되었습니다.


           먹거리(먹을 거리)는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배고플 때야 일단 배가 부르게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생각할 때입니다. 육식을 하는 사자와 호랑이는 사납고, 초식을 하는 소는 등치는 커도 순합니다. 옛날에 부잣집 아이들이 힘도 세고 거칠었던 이유가 고기를 많이 먹어서였을까요?


           얼마 전에 “옥수수의 습격”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소와 돼지들의 사료가 95% 이상이 옥수수라네요. 그 결과 고기가 부드럽고 먹기에 훨씬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고혈압, 당뇨, 관절염 등 현대인의 모든 병이 바로 그 옥수수 탓이라니 무섭지요? 6개월 동안 풀을 먹인 소고기를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내려갑니다. 풀 먹인 소에게서 나온 우유는 일반 우유보다 4배가 비싸고, 고기도 그렇게 비쌉니다만 꼭 그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유기농 식품이 비싸지만 수요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음식이 건강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수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먹거리는 육신의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수 많은 잡식을 하는 현대인은 분별력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뉴 에이지 음악을 듣고, 파괴적인 소설을 읽고, 인간의 양심과 본성에 거스르는 온갖 내용의 드라마와 영화와 동영상을 봅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훌륭한 문학과 예술은 점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게임에 밀려서 문학과 예술은 정신적인 식단에서 밀리기 일쑤입니다. 어른들의 분별력이 2세들의 정신적 먹거리를 챙겨 줄만큼 건강한지 의문입니다.


           요즘은 영적인 먹거리 시장이 매우 혼잡해졌습니다. 전에는 양심과 이성의 판단이면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세상이고, 이를 다수결로 정하고, 억지로, 부자연스럽게 법으로 정하여 강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미신과 갖가지 형태의 우상숭배가 문화라는 옷을 입고 버젓이 활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모두 종교라는 이름으로 배척을 당하는 때입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에 심취하는 서양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가 성경에서 영적 차원을 제외시키자 영적 갈증을 채울 수 없게 된 서양인들이 동양의 신비종교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안전장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음식은 기도를 드리고 나서 먹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 보면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조차도 기도하면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 거룩하게 됩니다. 식사기도를 감사기도라고 합니다만 감사만이 아닙니다. 음식을 하나님께 봉헌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식에는 부정한 것도 있고, 논밭에서부터 밥상에 오르는 동안에 우상에게 바쳐지기도 하고, 심지어 의도적인 저주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 모든 부정함과 저주가 깨뜨려지고 거룩한 음식이 됩니다.


           우리 부부가 적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는 자녀들을 낳으면서 이런 결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먹거리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비결이 의외로 간단합니다. “십일조를 드린 돈으로만 먹이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헌금을 드리고 남은 돈은 하나님의 돈입니다.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먹거리나 정신적인 먹거리나 육신의 먹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영화를 봅니다. “내가 보는 영화는 너희들도 다 볼 수 있고, 너희들이 보는 영화는 아버지도 다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십일조 드린 돈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좋아하는 게임이라도 하나님께 십일조 드린 돈으로 사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안 사줍니다.


           밥상 하나 차리는데 올라오는 음식은 가히 국제적입니다. 일일이 바른 먹거리인지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을 의지할 따름입니다.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좋은 먹거리, 무공해 유기농 먹거리만을 찾아 먹어도 안심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찾을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주님께 드린 먹거리, 주님께서 축복하신 먹거리가 진정 최고의 먹거리입니다. 주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시127:1)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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