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주여, 부흥(復興)을 내려주소서!

황의정 목사 0 10,734 2018.05.04 09:11

       부흥! 참으로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모하고 기도해 온 것, 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어느 날 대학 다니는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크신 능력에 붙들려 부흥의 일군으로 쓰임 받는 것이다!” 


           담임목회자가 없어 방황하며 명맥을 이어오던 교회에서 저를 담임 전도사로 청빙했었습니다. 그 때 스무 살 때의 짧은 목회 경험은 교회란 그렇게 잘 성장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수하며 기도하면 병자가 나았습니다. 꿈을 꾼 사람들이 해몽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기도가 그렇게 즐거웠습니다. 발로 밟으면서 연주하는 풍금, 삐거덕 소리가 음악소리보다 크게 들리던 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 강단을 두드리며 인도하는 찬양 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은혜의 단비가 내렸습니다. 강단에서도 설교노트가 젖고, 회중석에서도 방석이 젖었습니다. 정말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군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와서 갑자기 그만 둘 때까지 7명이 모이던 지하실 교회가 6개월 만에 60명이 되고, 청소년 30명, 어린이가 120명이 모였습니다. 제가 맛본 첫 부흥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부 많이 하고 꽤 유식해졌을 때에는 정말 한 영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여겨졌습니다. 선교사가 되어서도 이전처럼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음에 시시때때로 절망을 경험하였습니다. 거듭나는 신자들이 매주일 일어나고, 병자가 낫고,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일어났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부흥에 대한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다른 한 구석에서는 절망이 굳어져가면서 말입니다. 내 생애에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고 마쳐야한다면 어떻게 하나?

  


           미국에서 부흥의 끝자락을 만져보았습니다. 펜사콜라에도 가보고, 달라스 텍사스의 부흥회에도 다녀왔습니다. 빈야드 교회, 베니 힌 목사님의 집회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 은혜 받으려고,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고 싶어서요. 그 바쁜 공부 기간에 여기저기 쫓아다닌 것만으로도 제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셨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흥을 사모하는지 말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칼로스 아나콘디아의 부흥에 가장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왔던 90년대에 미국으로 그 불이 번져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뜻밖의 인물을 들어 쓰신다는 것,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을 모두 쓰신다는 것,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는 기적을 상식처럼 베푸시면서 죄인들이 회개하게 하시는 강력한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전 부흥에서 강조하지 않았던 영적전쟁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부흥이기도 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죄를 깊이 깨닫고 뉘우칩니다. 죄와 악을 떠나고, 악한 습관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영국 웨일즈 부흥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시죠? 회심한 탄광의 마부들이 욕을 하지 않고 말을 몰자 말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마차들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1990년대의 미국 펜사콜라 부흥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이 해방되고, 창녀들이 회심하고, 죄수들이 변화하는 바람에 도시 전체의 범죄율이 뚝 떨어졌습니다. 한 해 동안에 120명이던 신학교 학생이 12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 70%가 선교사로 삶을 헌신하였습니다. 대다수는 마약과 폭력과 도박과 매춘에 종사하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10년 동안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한 제목은 부흥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성령과 동행하는 부흥 ,화요일엔 성령세례 불세례를 받고, 성령충만과 기름부음을 구했습니다. 수요일에 말씀부흥을, 목요일에 치유부흥을 구했습니다. 금요일에 전도와 선교 부흥을 구하고, 토요일에 예배와 찬양부흥을 구했습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나서 우리 교회의 성장을 구하고, 건강과 자녀와 경제와 신분 문제를 위해서 구했습니다. 부흥이 살 길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부흥이 일어나면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더 이상 질서정연한 예배도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소위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이 교회에 몰려올 것입니다. 익숙하고 반가운 사람들만의 예배가 아니라 낯선 이방인들과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할지 모릅니다. 냄새도 나고, 더럽고, 추하고. . . 그런 사람들, 오직 예수님께서 강권하여 부르시지 않으면 절대로 예배당에 오지 않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몰려올 것입니다. 오히려 점잖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이 차고 넘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누가 더 냄새나는 사람일까요?

 


          작년에 1906년 아주사 부흥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깊었습니다. 1900년 어간에 엘에이 지역에서 수많은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주중에 파사데나와 엘에이 여기저기에서,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이 집 저 집에서 순수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금식하며 철야하며 딱히 누가 주동자라 할 것도 없고, 정해진 설교자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움직이며 기도회를 주도하던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거리끼게 될까봐 극도로 조심하였습니다. 육체의 성결만이 아니라 마음의 성결을 위해서 정말 조심조심하였습니다.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지 않으려고, 성령님을 훼방하거나 성령의 불을 끄게 될까봐 얼마나 간절하게 살았는지 보았습니다. 인류역사에 기리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 된 아주사 부흥은 이렇게 기도로 드린 산제사 위에 떨어진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부흥은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주십니다. 부흥은 거룩한 백성들에게 불로 응답하심입니다. 부흥은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건 헌신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입니다. 부흥은 영혼 구원을 생명 걸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개인과 민족이 살고, 나라가 살고, 세계가 사는 길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주여, 부흥을 내려주소서!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