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아버지께 편지쓰기

황의정 목사 0 10,294 2018.05.03 09:36

가정의 달이 지나갑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달입니다. 부부의 날도 있었지요. 어버이날은 원래 어머니날이었는데 아버지들이 소외된다고 하여 함께 기리는 날로 바꾸었답니다. 그러나 미국에는 아버지날이 따로 있습니다. 오는 6월 19일이 아버지 날, Father's Day!입니다. 아버지들이 그렇지 않아도 자꾸 위축되는 때에 아버지날이 따로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거의 매주 쓰는 목회서신 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7년 동안 8번을 썼더군요. 오늘의 이 글은 9번째가 됩니다.

어려서 아버님께 몇 번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타관에 가셔서 사업하시던 아버님께 어머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썼지요. 아버님 전상서,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시며, 두루 무탈하시온지요? 뭐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말을 받아 적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님도 습관적으로 불러주신 것이었습니다. 글을 배우지 못하신 어머님은 한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셨으니 까요. 아버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가 5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아버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훨씬 잘 이해하게 된 지금 아버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 물려받은 수많은 무형의 유산들을 헤아려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버님께서 병석에서 일어나신 것이 감사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수년 동안 병을 앓으셨습니다. 늘 건넌방 아랫목에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 계시고, 냄비에 주사기를 삶아서 손수 주사를 놓으시던 아버지가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아버지는 슬픔과 무기력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아랫목에 술상을 놓고 앉으셔서 우리 형제들을 앞에 횡렬로 앉혀놓고 술을 가르쳐주신 기억이 납니다.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아있으면 계속되는 아버님의 훈화(?)의 말씀은 가물가물해지고 몽롱한 중에 꾸벅꾸벅 졸게 됩니다. 그러면 건너가서 자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렇게 술을 배워서 술 마시면 실수하지 않고 잠을 자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희 형제들이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거나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다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술을 즐기지도 않지요.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집에 오실 때에는 언제나 선물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주로 학용품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 몫으로 큼직한 학생 가방을 사오셨습니다. 어찌나 크고 튼튼한지 몇 권의 책을 넣고 다니면 빈 가방 같았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버님의 얼굴을 살펴보았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하니 선물에 혼이 빠져서 아버님의 만족해하실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아버님은 제게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고 계신 일이 잘되면 아코디언을 사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아코디언은 받지는 못했습니다. 어려워지신 탓이지요. 그 후로부터 아코이언은 제게 특별한 악기가 되었습니다. 한 두번 만져볼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솝 우화에서 따먹을 수 없이 높이 달린 과일을 보면서 저 과일을 신과일이라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는 여우처럼 저는 아코디언은 너무 무겁고, 연주하기가 어려운 악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정치 이야기 하실 때를 빼면 별로 말이 없으셨습니다. 일대일로 자상하게 무엇을 묻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 우리 집에 오셔서 저를 데리고 철물점에 가셨습니다. 망치와 드라이버 등의 연장 몇 가지와 못과 철사 등을 사셨습니다. 빨래 줄을 잘 매주시고는 모든 연장을 집안의 연장으로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사이판에서 선교할 때에도 역시 집 뒤의 처마 밑에 길게 빨래 줄을 달아주셔서 얼마나 집사람이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못을 박거나 나사를 풀거나 사소한 일을 할 때마다 연장을 구해주신 아버님의 깊은 속뜻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강한 정의파였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젊어서 경찰로 봉사하실 때에는 청렴결백한 공무원으로 도지사와 이승만대통령의 표창도 받으셨습니다. 남을 섬기는 일에는 항상 열심이었지만 자기 몫을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조합 빚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장이 동네 사람들이 맡겨둔 인감도장을 도용하여 농협협동조합 돈을 빌려서 다 써버리고, 이자도 갚지 않아서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거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시느라고 아버님이 몇 달을 수고하셨습니다. 많이 탕감을 받았지만 그래도 가구마다 할당금액이 적지 않았습니다. 황주임(지서주임을 지내셨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음)님은 수고하셨으니 내지 않아야 한다는 동네 대표들의 강한 의견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동네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몫을 물어내셨습니다. 

전직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하셨고, 농지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지만 신통치 못해서 늘 가난했습니다. 법을 잘 아시고, 글을 잘 쓰시던 아버님은 사법서사를 하실 수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도 마다하셨습니다. 사법서사라는 것이 고소장을 대필하는 것인데 남들 싸움붙이고 얻어먹고 사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용기가 없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아버님의 결정이 위대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버지로 인해 오늘 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날을 맞이하여 아버지께 편지 쓰기를 합니다. 다음 2주 동안 아버지와의 추억, 못 다한 말을 편지나 시로 써서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날에 상도 주고, 소책자로 묶어서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편지에 사랑고백과 사죄와 용서와 그리움, 그리고 결단의 메시지를 적어주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건강한 둘로스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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