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행동하는 사랑

황의정 목사 0 15,335 2018.05.03 09:17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비실행적인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사랑을 육적으로 생각하거나 상대를 속박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고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토닉 사랑이라는 것은 건강한 사랑이지는 못합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히틀러에 학살된 동포들을 추모하는 기념관 앞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꼭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답니다. 2차 대전 중에 폴란드 작은 마을의 교사였던 코르자크는 독일 군인들이 와서 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던 유대인 학생들을 끌어내어 가스실로 데려갈 때 함께 트럭에 올랐습니다.“당신은 내리시오. 이 트럭은 유대인들만 타는 차요!”하는 말에“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아이들만 죽음의 구렁텅이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하였습니다. 트레몰랑카 강제 수용소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어느 독일 공산주의자가 나찌 포로수용소에서 갇혔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기독교인, 천주교인, 공산주의자, 범죄자 등 소위 그들의 기준으로 인간답지 못한 사람들을 아유슈비츠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살아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성경공부도, 전도도, 신학 강의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때문이었습니다.”수용소에서 이름이 불리면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 여자의 이름이 불렸습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갓난아기를 꼭 껴안으면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아기를 놓고 죽을 수 없는 모성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기를 데리고 죽음의 가스실로 가겠습니까? 그 때 기독교 신자였던 마리아가 일어섰습니다.“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엊그제 6.25 전쟁 60돌이 지났습니다. 16개 국가에서 UN군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미국, 영국,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카나다, 프랑스, 그리스, 콜롬비아, 태국, 에디오피아, 네델란드, 필리핀, 벨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질랜드, 그리고 룩셈부르크. 의료지원을 한 나라가 6개국입니다: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그리고 서독. 물자지원을 한 나라가 32개국이나 됩니다: 대만, 도미니카공화국, 레바논, 멕시코, 미얀마, 베네수엘라, 베트남,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스위스, 아르헨티나, 아이슬랜드,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오스트리아, 온두라스, 이스라엘, 이집트, 인도네시아, 일본, 칠레, 캄보디아, 코르타리카, 쿠바, 파나마, 파라과이, 파키스탄, 페루, 그리고 아이티 공화국. 총 54개 나라가 우리 나라를 도와주었습니다. 57,933명의 전사자/사망자, 481,155명의 부상/실종자 등 총 545,908명의 희생자가 났습니다.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웰링톤 국립묘지에는 우리나라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요청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고 새겨놓았습니다. 

생명을 바치는 처절한 전쟁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사랑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를 도왔던 나라들 중의 대부분이 우리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을 경제개발의 모델로, 정치발전의 모델국가로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말로 하는 사랑조차도 그 진가를 발휘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칭찬에 목마르고 인정에 굶주린 영혼들이 주변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8)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민족적으로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여러 나라에 받은 사랑과 복을 갚기 위해서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말로만은 안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처럼 행동이 없는 사랑도 죽은 것이니까요. 물질만으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행동하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둘로스가 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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