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일이 많은 것이 세상입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신비는 그 자체로 신비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사상이 발전하면서 기적과 이사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문예부흥이 일어나면서 시작된 사조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다른 한 편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신비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2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이성적, 합리적 세상인 물질의 세계와 초이성적, 초 합리적, 비물질적 세상인 영적 세계가 공존합니다. 중세의 암흑기에는 이성과 합리가 소홀히 취급되면서 자연재해의 원인을 마녀들의 장난으로 여겨 마녀사냥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역작용으로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사회가 도래하면서는 초이성적인 건전한 영역까지 모두 미신으로 몰아붙이며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설명해버리려는 오만한 시도가 득세하는 듯 했습니다. 세상이 건강하고 평안하고 발전적이 되려면 이 이성적, 합리적 세상과 초 합리적인 영적 세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이것이 어려웠습니다. 꼭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았던 것입니다.
기적은 사실 초자연의 세계가 자연적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과 신비는 비 과학이 아니고 초과학이요, 비이성이 아니고 초이성적 사건인 것입니다. 현실주의, 과학만능주의, 이성주의만을 고집하면 인간이 물질적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것은 이런 물질적 한계를 초월해서 초자연과 교류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다른 모든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며, 구세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또 예배하지도 못합니다. 인간만이 물질세계에 살면서 영적 세계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신비만을 추구하고, 신비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의 근본을 상실하고 구름 위에서 살려고 하는 오류가 됩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인 물질을 부인한다고 해서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비입니다. 자연은 남녀의 사랑으로 아기를 낳는 것인데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자연은 죽으면 몸이 썩는 것인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병이 나면 약을 먹고, 쉬고, 잘 먹어야 낫습니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을 얹고 기도하여 병이 낫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과학적인데 귀신을 쫓아내어 질병을 고칩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정신이상자가 아닐까요?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 또는 그 이상의 긴 시간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자리에서 일어날 때에 거인이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배우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로 기도를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말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방언과 통역이라는 은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사를 목적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신비주의라고 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초자연과 자연, 이성과 초이성, 과학과 초과학이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기도(신앙)와 질병치료(의학)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의과대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조차도 찬반양론이 팽배하던 귀신의 문제나 질병 치료를 위한 사역이 주요 교단에서조차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기독교 신학과 목회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소홀이 취급당했던 성령님과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보편적인 이해와 수용, 그리고 적극적인 자세가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교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신비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거룩한 웃음(Holy Laughter)이라고 하여 거의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을 만큼 웃는 현상, 몸을 거칠게 앞뒤로 흔드는 현상, 상한 치아가 금이나 아말감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현상, 한 순간에 체중이 확 줄어드는 현상, 그리고 금가루가 손과 얼굴과 사방에 내리는 현상 등입니다. 이런 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신비는 하나님께서 우리 유한한 물질적 존재인 인간과 만날 때에 수반되는 다양한 현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야말로 핵심이고 목적인데 현상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현상을 보고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건전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현상만을 추구하고, 현상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여기면 경계해야 할 신비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밀(神秘)에 쌓여계시지만 우리를 만나시려고 비밀의 베일을 벗고 오십니다. 많은 신비를 경험하여 하나님을 깊이 만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깊은 기도와 경건한 생활로 이루어진 거룩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신비에는 이같은 깊은 뜻, 이유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건강한 둘로스 교회의 행복한 담임목사 황의정 드림